어제와 화해하는 자판기
매일 밤 12시, 도시 곳곳에 홀연히 나타나는 신비로운 자판기가 있다. 이 자판기는 일반적인 음료가 아닌 '어제의 음료수'를 판다. 어제 마시고 싶었지만 마시지 못한 음료, 누군가와 함께 마시고 싶었던 음료, 특별한 순간과 연결된 음료를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의 음료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음료를 마시는 순간, 어제의 감정과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놓쳤던 기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일어난다. 자판기는 진정으로 어제와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 앞에만 나타나며, 같은 사람에게는 최대 세 번까지만 모습을 드러낸다.
홍대 근처 작은 갤러리에서 열린 '잃어버린 시간들' 전시회에서 세 명의 방문객이 만난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를 후회하는 회계사 김동철, 친구에게 상처를 준 카페 사장 이수진,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고등학생 박준우. 전시회를 기획한 큐레이터 한지민은 이들의 아픔을 직감적으로 알아채고, 각자에게 신비로운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넨다. 그날 밤, 세 사람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심야 자판기와 마주하게 된다. 동철은 아버지가 평생 즐겨 마셨던 보리차를, 수진은 친구와 마시려 했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준우는 할머니의 추억이 담긴 딸기우유를 마시며 어제의 진실과 마주한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20년 전 같은 동네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이 네 사람의 운명을 이미 엮어놓았던 것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동철이 구해낸 어린 수진, 화재 현장에서 다른 아이들을 구하다 폐를 다친 준우의 할머니, 그리고 그날 소방관으로 현장에 있었던 지민의 어머니까지. 자판기는 지민의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고, 사람들이 과거와 화해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이 신비로운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각자의 아픔 뒤에 숨겨진 사랑과 용서의 이야기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네 사람은 진정한 화해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마지막 밤, 네 사람이 함께 자판기 앞에 선다. 이번에는 각자가 아니라 함께 동전을 넣는다. 화면에는 20년 전 화재 현장이 나타나지만, 그날의 아픔이 아니라 서로를 도우며 위기를 극복했던 따뜻함이 부각된다. 자판기에서 나온 네 개의 따뜻한 차를 함께 마시며, 비로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진다. 동철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수진은 친구와의 우정을 회복하며, 준우는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는다. 자판기는 사라지지만, 네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제와 화해하는 방법이 남아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이 과거와 화해할 수 있도록 돕는 삶을 살아간다. 때때로 정말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 앞에는 여전히 그 신비로운 자판기가 나타난다고 한다.